- 지급명령 기한 마지막 날, 이의신청서가 도착했다
- 요지는 하나 — 면책받았으니 소를 제기할 수 없다
- 믿기지 않아서 직접 찾아봤다. 판례는 실제로 있었다
1. 집주인의 이의신청
지급명령을 신청하고, 나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집을 경매에 넘기고, 셀프 낙찰을 받아 보증금과 상계 후 소유권을 취득하려고 했다. 깡통전세, 손해가 예상되지만 나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빨리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지급명령 이의신청 기한 마지막 날, 법원으로부터 의외의 메일이 도착했다. 집주인이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처음 읽었을 때 당혹스러웠다. 집주인이 직접 쓴 글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조문을 인용하고, 판례 번호를 달고, 법리를 정리한 문서였다. 변호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나의 연락은 전혀 받지 않고, 무책임하게 파산한 인간이 아직도 변호사의 비공식적 조력을 받고 있었다.
이의신청서의 요지는 간단했다.
파산 면책결정을 받았으므로, 임차보증금 반환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2. 대법원은 임차인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럴리 없다고 믿었다. 나는 선순위 임차인이다. 확정일자도 있고, 임차권등기명령도 완료했다.
바쁘게 인터넷을 뒤져봤다. 관련 판례가 있었다. 대법원 2025.6.12. 선고 2022다247378. 선고일이 불과 1년도 안 됐다. 꽤나 논란이 되었던 판례였다.
면책결정의 효력은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부분을 포함하여 주택임차인의 보증금반환채권 전부에 미친다. 임차인으로서는 이후 주택이 환가되는 경우 그 환가대금에 관하여 자신의 우선변제권을 주장할 수 있을 뿐, 채무자를 상대로 보증금반환채권의 이행을 소구할 수 없다.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표현이 이런 순간을 위해 있는 것 같았다.
3. 너무도 불합리한 상황
판례의 논리는 이렇다. 소구는 안 되지만, 환가가 되면 우선변제권을 주장할 수 있다. 얼핏 절충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환가’는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파산관재인은 이미 이 오피스텔을 파산재단에서 포기했다. 재단포기가 허가된 순간, 오피스텔은 다시 집주인 개인 소유로 귀속됐다. 파산절차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임차인이 직접 경매를 신청하면 되지 않느냐. 안 된다. 임차인에게는 경매신청권이 없다. 다른 담보권자가 경매를 신청해주면 되지 않느냐. 없다. 이 집에는 선순위 담보권자가 없다.
소구도 안 된다. 경매신청도 안 된다. 임의경매를 기대할 다른 권리자도 없다.
이 집은 지금, 아무도 강제집행할 수 없는 상태다. 대법원이 남겨둔 ‘환가’라는 출구가 실제로는 봉쇄되어 있다. 판결이 상정하지 않은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4. 국회는 노력하고 있다지만
이 상황에 대한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를 읽었다. 상황의 모순을 정확히 인지하고, 임차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제안하는 정말 고마운 문서였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안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더 화가 났다.
2026년 4월 23일, 전세사기피해자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에는 임대인이 파산하더라도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임차보증금은 면책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나는 그 보호막 바깥에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임대인의 고의성이 있어야 한다. 고의성을 증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수많은 피해자가 이 문턱에서 걸러진다. 특별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피해자들도 분명히 있다. 나처럼.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채무자회생법 개정안도 별도로 발의되어 계류 중이다. 다만, 소급적용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안은 없었다. 절망스러웠다.
5. 법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2억 원이 묶인 채로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 집에 꼼짝없이 계속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면, 그 모든 부담은 내가 져야 한다. 피해자가 오히려 더 옥죄이는 구조다.
소송은 할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대법원 판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상황은 너무 절망적이다. 법원 스스로의 판단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면, 법원이 해석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이 싸움을 혼자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싸움이다. 변호사와 대응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